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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교구,본당,수도회)

[사회현안특강]2018년 5월 "대만문제-중국의 핵심이익"

■ 대만문제- 중국의 핵심이익

 

개요:
[사회현안특강]2018년 5월 "대만문제-중국의 핵심이익"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교리 "더나은세상" 주관의 2018년 제4차 사회현안 특강

 

 

 

 

(다음 6월 5차특강안내 - 2018.6.8 저녁7시, 명동 가톨릭회관 4층 426-1,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기술과 급변하는 사회의 이해)

 

 오디오강의 중 앞부분 30분은 오디오 음질이 저하되어 30분 이후분을 업로드합니다.
또한, ppt자료를 중심으로 한 강의입니다. 그래서 사진, 그래프등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설명한 부분은 다소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정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가장큰 관심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것입니다. (운영자 의견)

 

      

 

 



http://www.podbbang.com/ch/16115?e=22610251

 

 


 

 


제목: 臺灣(대만)문제 – 중국의 ‘핵심이익’
 
■ 중국지도자는 대만문제를 (중국이) 서방으로 받는 모욕의 상징으로 간주
 
“대만과의 통일이 이루어 지기 전에 서방의 모욕은 계속될 것이고, 중국의 치욕은 씻겨지지 않을 것”이라고 중국의 학자들 주장
 
국제법은 “동일한 영토 안에 주권국가는 하나만 존재한다”고 규정
 
장지에스(蔣介石)도,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고 오직 하나만의 중국이 존재한다”라고 주장

■ 中國 崛起(굴기)의 최대도전은 ...

‘臺獨(대만 독립)’세력의 팽창으로 대만해협에서 美中 충돌을 야기할 가능성.
중국이 통일의 목표를 실현하지 못하고 崛起과정 중에 전쟁을 겪으면, 중국의 굴기를 지연 시키거나 좌절하게 될 것.

80년대 덩 샤오핑은 一國兩制를 주장하여, 평화통일의 의지를 밝혔다.
 
중국정부는 이 방식으로 홍콩과 마카오의 回歸를 실현
 
■ 냉전 후 소련으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졌을 때, 미국은 대만문제를 중국을 견제하는 카드로 쓰기 시작.

대만문제에 대해 모호전략(strategy of ambiguity, 模糊戰略) 사용.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며 대만독립에 반대한다
  (只有一个中國, 反對臺獨)” 표명
  다른 방면으로는, 대만의 분열활동 고무.

‣ 1996년 초 인민해방군이 남중국해와 동 중국해에서 군사훈련 할 때, 미국은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 항공모함 2개 편대를 대만부근 해역으로 출동, 대만을 무력으로 보호하겠다는 결심 드러내.
 
대만해협에서의 미사일 위기 때, 중국은 대만독립을 저지하기 위하여 강경한 조치를 하겠다고 위협.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국가라는 인상을 각인.

‣ 대만문제를 평화적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가 중국미래의 가장 큰 장애물이고, 중국 국가안보의 가장 큰 우려사항
 
‣ 중국은 2005년 3월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반국가분열법(反國家分裂法) 통과, 법률전(法律戰) 준비.
비평화적 수단으로 대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단서,
 
‣ 和平崛起 (화평굴기) 혹은 화평발전 전략을 합리화하려는 것
평화적 방식으로 국가통일을 달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

‣ 중국에게 대만은 전략적 위치, 주권, 영토완정, 민족주의의 현실적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생존이익에 관계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 (core interest).
■ 대만의 화(和)와 전(戰)은 늘 중국 지도자에게 최대의 임무

한 편으로는 최소의 대가로 통일의 목적을 달성하여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길 희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을 시작하여 대내적으로 정치적 안정에 악영향을 주고, 대외적으로는 미국, 일본과 적이 되어서 경제성장의 성과가 훼손되는 것을 피하기를 희망.

‣ 민족주의, 국가의 존엄성과 정치적 지위 확보의 필요성으로 대만독립은 절대로 용인 하지 않으며, 무력으로 대응할 것.
 
따라서 대만은 미래 美中 충돌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화점.
 
‣ 대만에 대한 감정은 많은 중국인들에게 잃어버린 영토와 같아서 대만을 수복하는 것이 중국인의 존엄과 책임의 문제라고 인식. 만약 대만이 중국이 기대하는 방향으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충돌이 발생.

‣ 중화민족주의의 특성을 보면, 대만문제는 중국인의 충동성을 자극할 것.
중국 입장으로는 화평굴기의 대상은 국제사회, 대만문제는 중국의 내정문제의 일부분이라고 인식.

‣ 중국이 인정하여야 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눈으로 대만문제의 평화적 해결여부가 중국이 화평굴기를  할 수 있느냐의 점검소재(所在) 만약 兩岸(양안)사이에 평화통일의 최종적 결과가 없다면 중국의 화평굴기는 허상이라고 국제사회는 인식할 것.
 
‣ 후진타오(胡錦濤)가 화평발전이 대만정책의 주축이라고 강조한 것은 정책적인 필요성일 뿐 아니라 중국이 반드시 화평굴기해야 하는 현실적 고려이기도 하다.
 
‣ 중국이 건국 된지 70년이 지났고, 250만 명의 인민해방군이 있지만 잠재된 생존위협에 직면해 있는데, 바로 분리주의(分離主義)의 위협.

■ 분리주의가 중국에 주는 위협은 생존성
 
중국정부는 분열을 제지하는 것을 두 번째의 국방임무로 간주
중국의 분리주의 세력중 가장 위험하고 현실적 위협은 대만의 독립. 대만 분리주의의 주요 역량은 한인(漢人)이고 소수민족이 아니다. 이 때문에 대만 분리주의의 정치적 위험성이 소수민족보다 더욱 크다.

대만독립을 용인하는 것은 중국이 화평굴기의 전략목표를 실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중국의 국가멸망, 민족쇠락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 1992년 리덩후이(李登輝)
신대만인(新臺灣人)의 이름으로 대만 독립정책을 추진,
1999년에는 양국론(兩國論)을 선포하여 공개적으로 독립 추진

‣ 2000년 민진당(民進黨)의 천수이비엔(陳水扁)이 집권한 후 대만은 공개적(公開的) 독립에서 법리적(法理的) 독립으로 가속화
 
‣ 2003년 대만은 국민투표로 입헌을 하겠다고 천명
 
‣ 2006년 헌법초안을 통과시켰으며 2008년까지 헌법개정을 실시하여 정식으로 독립할 계획이었다.
배후에 미국의 군사적인 지지가 있었다고 함.
외부 군사지원이 없이 분리주의의 군사력이 중앙정부를 능가하기 힘들다.
 
‣ 1992년 리덩후이(李登輝)의 대만독립 추진 이후 대만인의 민족정체성 질적인 변화.

‣ 대만 연합보(聯合報)의 2003년 조사에 의하면
1989년-2002년 사이
자신이 중국인이 아니고 대만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16%에서 62%로 증가 대만인이 아니고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52%에서 19%로 감소.
대만당국이 주동적으로 독립을 포기하기란 불가능 중국이 전쟁을 할 결심과 수행능력이 있을 때에만 대만통일이 가능 현재의 중국 지도부가 가지는 입장은 마오저뚱(毛澤東) 시기의 입장에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대만문제의 해결이 민족의 자주성 회복이라는 점은 고수하고 있으나 평화적이고 점진적으로 처리.

■ 기본적인 대 전제는 대만정부가 兩岸문제를 중국내부의 문제라고 주장해야

‣ 1949년부터 중국은
역사적 사실, 양안의 정세, 양안의 역량과 국제정치적 환경을 고려하여 대만정책을 수립하였다고 주장

‣ 1949년부터~ 1955년 4월까지의 시기에는
무력으로 대만을 통일하겠지만,
평화적 접근을 해올 경우 거부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
이 시기 통일정책의 내용은 대만 도서(島嶼)지방에 대한 무력병합이라는 일면과 양측의 충돌에 있어서 협상과 평화적 철수를 보장하는 양면성을 지니면서 자신감을 상실한 채 통일정책을 추진한 기간.

중국이 미국을 의식하여 통일의 명분을 찾기보다 미국과의 충돌을 회피하는 실리를 선택.

‣ 1955년 4월에서~ 1978년 12월까지의 시기
양측은 귀순자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선전전(propaganda)
 
평화적 방법으로 대만을 통일시키겠지만 무력사용을 배제하지 않으며 대만이 사회주의를 채택할 것 요구
 
대내적으로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소련과의 이념적, 군사적 충돌로 인한 고립감으로 내우외환의 상태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려 했다.

‣ 1979년 1월부터~현재
 
중국은 1978년 12월 중공 제11기 3중 전회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 무력통일정책을 평화통일노선으로 전환
1979년 1월 예지앤잉(葉劍英)의 원칙이 전국인대(全國人大) 명의로 채택 이를 시작으로 중국은 무력통일 정책을 폐기하고 평화통일 방안.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제시하면서 대만의 체제 인정
통일 후에도 대만자체의 정치, 경제, 사회제도와 외국과의 경제 및 문화적 관계가 유지되며 독자적 군대와 사법권도 유지.
이러한 내용은 법제화되었는데 ‘일국양제’ 1984년 영국과 중국의 ‘Hongkong 문제에 대한 공동성명’ 에 적용.

■ 대만당국도 38년이나 계속된 계엄령을 1987년에 해제하고
3不정책(불담판 不談判, 불접촉 不接觸, 불타협 不妥協)을 수정
대만은 1991년 해협교류기금회를 발족하고, 중국의 해협양안관계협회와 회의를 1993년 Singapore에서 개최.

‣ 1995년 여름과 1996년 봄 중국이 missile시험과 군사훈련을 하였는데, 중국은 양안문제를 내정문제로 국한시키려 하고, 타이완은 양안문제를 국제화하고 다자안보의 틀에서 평화정착을 확보하려 함.
‣ 2005年 10기 전국인대 3차회의 ‘반국가분열법’(反分裂國家法)을 통과
 
‣ 2006년 4월 후진타오(胡錦濤)는 국민당 주석 리앤잔(連戰)과 인민대회당 복건청(福建廳)에서 60년 만에 국공회담을 개최 / 대만독립 반대.

후진타오는 親民黨주석 쑹추위(宋楚瑜),부주석 장자오슝(張昭雄)과 회담
 
양안 인민은 염황(炎黃)의 자손이라는 것을 강조.


 

다음 특강은

- 2018. 6. 8. 저녁 7시,

- 서울 명동 가톡릭회관 426-1호,

- 사회현안에 대해 관심있는분은 모두 청강하실 수 있습니다.(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