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목) 행사-종교인 탈핵순례길 행사 / 사회적약자를 위한 미사
■ 4월 종교인 서울 탈핵순례길 행사
-4월 종교인 서울 탈핵순례길
일시: 2018. 4. 26.(목) 오전 11시 30분
장소: 조계사-인사동-종각-광화문광장
문의: 010-3269-2516
■ 사회적 약자를 위한 미사(장애인)
-사회적 약자를 위한 미사(장애인)
일시: 2018. 4. 26. (목) 저녁 7시
장소: 서울 명동대성당
2018년 4월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는 미사(2018.4.26.)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루카 6,8)
▣ 미사 지향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기념하며 여전히 우리 사회 안에서 지속되는 차별과 소외를 경험하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장애인 인권 개선을 위한 장애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연대함으로써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과 용기를 청하며 함께 기도합니다.
▣ 취지
눈물로 간청하는 부모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끝내 장애인학교 신축을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의 이야기와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를 촉구하며 눈물의 삭발식을 거행한 장애아 부모들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사회적 약자들과 더불어 살아감에 있어 미숙하고 인색한 사회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장애인 시설을 혐오하고 반대하는 현상의 배후에는 ‘돈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비용과 수익성을 앞세우는 논리는 장애인에 대한 냉대, 혐오로 그치지 않으며 수익을 창출하지 못한다고 인정되는 이들, 사회적 약자 대다수가 포함되는 이들에 대한 혐오로 확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연대는 우리가 경험하는 불의와 부조리의 배후에 있는 ‘물신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연대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를 통해 우리 가운데 함께 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미사를 봉헌합니다.
▣ 강론(요약)
지난 4월 20일은 서른여섯 번째를 맞이하는 장애인의 날이었다. 장애인의 날을 기념한 지 서른여섯 해가 되었지만 정작 장애에 대한 인식의 개선은,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개선은 여전히 느리거나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장애인 학교 설립을 ‘결사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의 이기주의와 ‘발달장애인에 대한 국가 책임제’의 실현을 위해 그들의 어머니들이 눈물 속에 삭발을 하며 호소를 해야만 하는 현실은 아직도 우리 사회가 미성숙한 사회,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만을 자랑하기에는 ‘후진’ 사회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현실이 아닐까 싶다.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또는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사람들이 지녔던 장애에 대한 편견이 장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음에 비해, 장애에 대한 과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오늘에 목도하는 장애에 대한 편견은 사실 그 정당성을 찾을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장애인 학교나 장애인 시설을 ‘혐오 시설’이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동네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이면에는, 그리고 장애인과 그 부모들이 시급히 개선해야 하는 과제라고 말하는 ‘부양의무제 폐지’와 ‘장애등급제 폐지’를 하지 않는 이유의 이면에는 ‘돈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존중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인간존엄성’을 보호하고 신장하는 것이 사회, 국가의 존재 이유라고 말하면서도 실재 그것에 대한 책임은 각자가 부담하라고 하는 모순된 현실이 지속되는 이면에는 ‘생산성’, ‘효율’을 절대적 ‘선’이라 여기는 ‘물신’이 지배하는 우리 시대의 부조리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음을 헤아리게 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제목의 영화는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영국에서 겪어야 하는 불합리한 현실을 고발한다. 자신의 어려운 현실을 스스로 증명하도록 요구받는 현실에서 필요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게 되는 주인공을 통해 영화는 ‘선별적 복지’가 대상이 되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모욕을 주는 잘못인지를 고발한다. 사회적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도움을 요청하는 이 스스로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유, 빈곤을 증명해야 한다고 요구하며 모욕을 주는 폭력적 현실을 고발한다. ‘선별적 복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도움을 제공하는 ‘복지’라고 하면서도 실상 그 대상을 모욕한다.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역경,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통념도, 사실은 우리에게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 그래서 사회적 지원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더 열심히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불성실한 사람’이라는 편견을 갖게 한다. ‘장애’는 개인이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의 한 모습이라는 것, 서로가 다름을 존중하듯이 ‘장애’ 역시 ‘다름’의 하나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장애만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이 ‘사회적 약자’라고 칭하는 이들이 지닌 ‘약함’ 역시 다름으로서 이해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사회의 냉대, 무관심, 더 나아가 편견만이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아님을, 교회 안에 존재하는 무관심과 냉대, 편견 역시 우선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임을 절감한다. 수많은 성당과 교회 시설이 있지만 장애를 지닌 이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많음을, 그들이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함께 할 수 있는 배려가 없는 곳이 많음을 보게 된다. 그 이면에도 ‘돈’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되물어보게 된다. 장애인들이 배제되는 교회는 그만큼 스스로를 불완전하게 만든다.
우리가 희망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보호되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존중이 우선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은 우선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 공감, 그리고 연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통 받는 이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 아픔을 나누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하는 것보다 더 분명한 존중은 없을 것이다.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대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인간 존엄성’이 실현되는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신 말씀을 들었다. ‘안식일법’은 사회정의를 위해 제정된 신법이다. 주인이 안식일에 쉬어야만 그의 밑에서 일하는 종들이나 일꾼들, 가축들까지 쉴 수 있기에 사회적 약자들의 쉼을 위해 제정된 법이 ‘안식일법’이다. 곧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제정된 법이며 공동체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제정된 법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신 행위를 두고서 예수님을 공격한다. 하느님의 법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제정된 것임을 망각하였기에 그들은 그 법으로 사람을 억압하는 셈이다. 그것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처럼 심각한 오류를 범한다. 하느님의 법은 사람을 살리도록,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도록 우리를 움직인다.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에 세우셨다. 장애로 인해 관계가 단절된 사람, 장애로 인해 하느님 백성의 무리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되는 이를 가운데에 세우시며 그가 있어야 하는 자리가 백성의 바깥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라는 것을, 편견과 무관심으로 인해 소외된 이가 백성의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우리가 들은 독서 말씀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왕국의 패망과 유배를 겪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질 회복을 예고한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을 예고하며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남은 이들을 모아들이시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경신례에 참석할 수 없었던,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무리에서 제외되었던 이들, 곧 장애를 가진 이들, 눈먼 이들, 다리를 저는 이들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한다. 제의 공동체에 포함된 이들만이 아닌, 이방인들, 원수로서 종종 지칭되었던 이들까지도 함께 하는 것이 장차 이루어질 구원이라고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하였던 것처럼 ‘구원’은 한정된 이들만의 친교를 의미하지 않는다. 장애를 가진 이들이 배제된 하느님 백성의 구원은 없다.